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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s

Birger Kaipiainen

Birger Kaipiainen

비르예르 카이피아이넨

1915 - 1988 핀란드 도예가, 디자이너
  • 아라비아(Arabia) / 활동시기 1937 - 1954, 1958 - 1988
  • 로스트란드(Rörstrand) / 활동시기 1954-1958

Biography

  • 핀란드 포리(Pori) 출생

  • 헬싱키 아테네움 예술대학(Ateneum art school) 졸업

  • 아라비아(Arabia) 입사, 예술 부서(Art Department) 근무

  • 이탈리아 리처드 지노리(Richard Ginori)에서 연수

  • 아라비아(Arabia)를 떠나 스웨덴 로스트란드(Rörstrand)에 들어감

  • 아라비아(Arabia)로 복귀

  • 마기 할로넨(Maggi Halonen)과 결혼

  •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마도요 새(Curlew bird made out of beads)로 그랑프리 수상

  • 아내 마기 할로넨(Maggi Halonen) 병으로 세상을 떠남

  • 캐나다 몬트리올 엑스포에 '제비꽃의 바다'(Orvokkimeri / 45,5 X 9m) 출품

  • 명예 교수 칭호를 얻음

  • 예술가 연금 부여

  • 세상을 떠남

MORE BIOGRAPHY

비르에르 카이피아이넨(Birger Kaipiainen)은 1915년 1월 7일 핀란드 포리(Pori)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다. 이듬해 그의 가족은 헬싱키로 이주한다. 1920년대 중반 그의 가족은 여름 휴가를 핀란드와 러시아의 국경에 위치한 소르타발라(Sortavala)의 라도가 호수(Lake Ladoga)에서 보내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아트 스쿨에 다니던 헬렌 바라노브스키(Helen Baranovski) 가족과 함께 지내며 젊은 로맨티스트 예술가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에게는 예술적 감성을 품게 된 첫 경험의 국제적인 예술 사교 무대였다. 그는 조숙하였으며 문학과 드로잉을 즐기는 예술적 감성으로 가득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학교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 수학은 낙제에 가까웠다. 그의 장래가 늘 걱정이었던 어머니는 고민 끝에 헬싱키 아테네움 예술대학(Ateneum art school)의 교수로 있던 아르튜 부룸머(Arttu Brummer)에게 그를 데려가 상담을 한다. 아르튜 부룸머는 비르에르 카이피아이넨에게 나비와 꽃을 그려보라고 한다. 그가 그린 나비와 꽃을 보고 재능을 발견한 아르튜 부룸머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비르에르 카이피아이넨는 학교에서 꽤 튀는 학생이었다. 당시 예술 사조는 기능주의(Functionalism)가 중심이었지만, 그는 시적인 세계를 고집한 로맨티스트였다. 유행과 상관없이 자신의 확고한 예술관을 가지고 있었던 그의 재능을 높이 산 교수들은 그의 디자인을 지지해 주었다.

 1937년 졸업 후 그는 아라비아(Arabia)의 예술 부서(Arabia Art Department)에 스카우트되어 근무하게 된다. 다른 아티스트와 달리 그는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자신만의 작품 활동을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무렵 그에게 큰 시련이 닥친다.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에 장애가 생긴다. 또한 그 시기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이러한 고통의 시간들 속에서 그가 현실을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출구는 디자인의 예술에 빠져 보내는 것뿐이었다. 더불어 전쟁이라는 암울한 시기 속에서 처음에는 단순하면서 순수한 흥미였을 수도 있을 시적인 그의 디자인들은 핀란드 사람들에게, 또한 그 자신 스스로에게 마음의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1940년대에 낭만적인 그의 작품은 대중들 사이에서 소소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늘 음악, 오페라, 발레 등에 심취해 있었으며 이러한 예술적 감성은 고스란히 그의 작품 전반에 드리워져 있었다.

 1949년 초 그는 이탈리아의 리처드 지노리(Richard Ginori)에서 잠시 일할 수 있는 연수 기회가 주어진다. 이때 밀라노에서 소규모 전시도 개최한다. 그에게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은 궁극적으로 초기 르네상스를 생각하게 하는 파스텔 색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품 스타일로 이후에 나타난다. 또한 마시모 캄필리(Massimo Campigli)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연상하게 하는 여인들이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기 시작한다.

1950년대 그는 2차원의 파이앙스 페이팅(faïence painting)을 구슬 등을 이용한 접시나 세라믹 피겨린(ceramic figurin) 등 3차원으로 풀어내려는 시도들을 한다. 

그는 차이코프스키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등 발레 의상 디자인을 맡기도 한다.

1954년 그는 아라비아(Arabia)를 떠나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로스트란드(Rörstrand)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극적인 색상 표현과 초현실주를 강하게 드러내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1958년 말 다시 핀란드의 아라비아로 돌아온 그는 마리메코(Marimekko)를 세운 빌요 라티아(Viljo Ratia)의 아내 아르미 라티아(Armi Ratia)의 소개로 경제학자였던 마기 할로넨(Maggi Halonen)를 만난다. 그해 겨울 그녀와 함께 프랑스 여행을 가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파리 핀란드 대사관에서 결혼을 한다. 그는 1960년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선보인 마도요 새(Curlew bird made out of beads)로 그랑프리를 받는다. 1966년 갑자기 아내 마기 할로넨(Maggi Halonen)이 병으로 그의 곁을 떠난다. 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 엑스포에서 그는 거대한 '제비꽃의 바다'(Orvokkimeri / 45,5 X 9m) 작품을 출품한다. 그 작품은 이후에 핀란드 탐페레(Tampere) 시의회 회의실에 설치된다.

'제비꽃의 바다'(Orvokkimeri / 45,5 X 9m)

그는 1977년 명예 교수 칭호를 얻었으며, 1981년 예술가의 연금이 부여되기 시작했음에도 거의 매일 아라비아에 출근하여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88년 7월 18일 그날도 여전히 아라비아에 출근하여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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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1945년 아라비아 디자이너들 좌측으로부터 Aune Siimes, Michael Schilkin, Toini Muona, Friedl Holzer-Kjellberg, Kurt Ekholm, Lea von Mickwitz, Birger Kaipiainen, Rut Bryk
1954년 가을, 로스트란드 전성기의 대표 아티스트들
뒷줄 왼쪽부터 Sylvia Leuchovius(39세), C-H Stålhane(34세), Birger Kaipiainen(39세), Hertha Bengtsson(37세)
앞줄 Marianne Westman(26세)

자료, 사진 출처

https://kansallisbiografia.fi/kansallisbiografia/henkilo/4804

http://www.porslinsbloggen.se/?p=13165

https://en.wikipedia.org/wiki/Birger_Kaipiainen

https://www.kuovi.fi/en/content/birger-kaipiainen

https://www.booksfromfinland.fi/2013/08/a-rare-bird-from-fancyland/

https://jonasforth.com/2013/12/30/designers-hanging-together/

https://jonasforth.com/2013/12/30/designers-hanging-toge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