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s

Johann Joachim Kändler
요한 요아힘 켄들러
1706 - 1775 독일 도예가 (피겨린 모델러)- Meissen / 활동시기 1731-1775
B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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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 06. 15 독일 아르스도르프 근교의 피슈바흐(Fischbach)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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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넘게 마이센(Meissen)에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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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 서비스(Swan Service) 도자기 식기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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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센 동물원(Meissener Menagerie)제작, 강왕 아우구스트의 일본 궁전(Japanisches Palais)에 전시하기 위해 제작된 대형 도자기 동물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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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 05. 18 향년 69세로 사망. 마이센의 성 아프라 성당(St Afra's Abbey, Meissen)에 안치되었다.
요한 요아힘 켄들러(J.J.Kaender, 1706년 6월 15일 ~ 1775년 5월 18일)는 독일의 조각가로 마이센(Meissen) 도자기를 비롯해 모든 유럽 도자기에서 가장 중요한 모델러(Modeller)이다. 그는 1731년부터 1775년 사망할 때까지 40년 넘게 마이센에서 일했다. 그는 18세기 유럽 도자기 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정교하고 사실적인 도자기 조각상과 장식품을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켄들러(Kändler)는 1706년 6월 15일, 작센의 피슈바흐(Fischbach)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전적인 교육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그 덕분에 그리스 신화에 대한 뛰어난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지식과 함께 우수한 손재주 및 뛰어난 관찰력이 그의 후일 경력을 쌓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켄들러(Kändler)의 직업적 경력은 유명한 드레스덴 궁정 조각가이자 제단 조각가인 요한 벤자민 토마에(Johann Benjamin Thomae, 1682–1751) 밑에서 시작되었다. 피슈바흐 출신의 목사 아들인 켄들러는 이곳에서 수습공으로 일하며 조각 기술을 익혔다. 이미 이때부터 탁월한 손재주와 비범한 이해력을 발휘하였으며, 이는 그가 젊은 나이에 중요한 작업을 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결국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1786)의 궁정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의 재능은 곧 주목받았고, 1731년 6월 22일, 25세의 나이에 폴란드의 국왕이자, 작센의 선제후인 강왕 아우구스투스 (August the Strong)에 의해 궁정 조각가로 임명되었다. 또한 마이센(Meissen) 도자기 제조소의 모델러로 채용되어 모델 마스터(Modellmeister) 로 활동했다. 그의 초기 도자기 동물 조각들은 드레스덴 조각 양식의 영향을 받아 자연의 인상을 생동감 있게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그는 조형 디자인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결국 비밀 기술을 관리하는 아르카니스트(Arkanist)로 승진하였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큰 정점은 1749년 "궁정 감독관(Hofkommissar)"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켄들러가 마이센을 위해 만든 작품들은 도자기 제작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의 제작 방식은 구리판 삽화(Copperplate Engraving)를 모델로 삼았으나, 그는 실제 자연을 연구하기 위해 여행을 다녔다. 그의 초기 조각들은 주로 동물 세계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생생한 자연미와 우아함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기존의 과장된 표현과 달리, 그의 조각들은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유명한 작품으로는 어치와 다람쥐(Aichelhäher mit Eichhörnchen), 사슴벌레가 있는 꾀꼬리(Pirol mit Hirschkäfer), 오색새와 풍뎅이(Wiedehopf mit Maikäfer) 등이 있다.

1738년, 그는 브륄 백작(Heinrich von Brühl)의 의뢰를 받아 "백조 서비스(Swan Service)" 를 제작하면서, 도자기 식기에 작은 인물 장식(소형 조각 장면)을 결합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개발하였다. 그의 작품은 우아한 곡선미와 경쾌한 아름다움이 특징이며, 로코코(Rococo) 스타일의 정수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오늘날 바로크 도자기 예술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켄들러는 이를 계기로 그는 장식용 소형 인물 조각(Small Decorative Figures) 제작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이후 켄들러는 궁정 생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특히 당시 유행하던 연극 장르인 "코메디아 델아르테(Commedia dell'arte)"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로코코 스타일을 담은 인물 조각과 다양한 액세서리를 제작했으며, 이를 통해 코메디아 델아르테의 캐릭터들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그가 만든 1,000여 개 이상의 다양한 조각상들 중에서 특히 유명한 작품은 1753년에 제작된 "몽키 오케스트라(Monkey Ochestra)"이다. 켄들러는 이 작품을 통해 "강박적인 형식주의에 대한 풍자" 를 담아냈으며, 이는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핵심 이념인 자유롭고 합리적인 인간에 대한 찬사로 해석되었다. 이 작품은 당시 시대정신과 완벽하게 부합하는 걸작으로, 오늘날에도 유럽 도자기 예술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으며, 여전히 복제 제작되고 있다.

켄들러는 단순한 조각가로서의 역할을 넘어 마이센 도자기 제조소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처음에는 조형의 책임자로서 이후에는 제조소의 비밀 기술을 관리하는 아르카니스트(Arkanist) 로서, 7년 전쟁(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1756-1763)이라는 불안정한 기간 동안 국영 도자기 제조을 이끌었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생산을 계속해 나갔다.
켄들러의 재정적 성공은 그의 사회적 지위 상승과 나란히 이어졌다. 생애 말년에는 여러 부동산과 포도원도 소유하고 있었지만, 1775년 사망했을 때 상당한 부채를 남겼다.
45년 동안 마이센 도자기 공장에서 활동한 요한 요아힘 켄들러는 1775년 5월 17일, 마이센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이센의 켄들러 분수(Kändlerbrunnen in Meissen)


피슈바흐(Fischbach)에서는 마이센(Meissen) 도자기로 제작된 기념판이 켄들러(Kändler)의 생가였던 마을의 목사관(Pfarrhaus)에 부착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또한,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마을에 존재한다.
마이센의 엘베 강 왼편 지역 링크젤비셰(Linkselbische)에는 "켄들러 공원(Kändlerpark)"과 "켄들러 분수(Kändlerbrunnen)"가 위치해 있다.
이 공원과 분수는 1960년6월 4일 마이센 도자기 제조소 설립 250주년을 기념하여 개장되었다. 분수는 루트비히 제프너(Ludwig Zepner)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화강암 기둥 위에는 1733년, 조각가 요한 요아힘 켄들러(Johann Joachim Kaendler, 1706–1775)가 제작한 모델을 기반으로 한 흰색 마이센 도자기 화식조(Kasuar, 주행성 대형 조류)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복적인 도난 및 훼손 시도로 인해, 현재 마이센 시청(Rathaus)에 보관된 것이 진짜 마이센 도자기로 만든 화식조(Porzellankasuar)이고, 켄들러 분수에는 붉은 화강암 기둥 위에 40kg 무게의 플라스틱 조각상이 대신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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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works
유럽 왕실을 위한 인물 및 동물 조각 – 사실적인 동물 및 인물 조각.

이 염소 조각상은 작센 선제후 강왕 아우구스투스 (Augustus the Strong)가 드레스덴(Dresden)의 "일본식 궁전(Japanese Palace)"을 위해 주문한 수백 점의 실물 크기 도자기 동물 및 조류 조각상 중 하나이다.
1730년부터 1736년 까지 선제후의 의뢰를 받아 모델러인 요한 고틀리브 키르히너(Johann Gottlieb Kirchner, 1706 -1768)와 요한 요아힘 켄들러(Johann Joachim Kaendler)는 대형 동물 조각상을 대량으로 제작하였다. 가축과 이국적인 동물을 포함한 이러한 도자기 동물들은 선제후의 권위를 상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 도자기 조각상들은 1710년 아우구스투스 강왕의 후원 아래 설립된 마이센 도자기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마이센은 유럽 최초로 경질 자기(hard-paste porcelain) 제조에 성공한 공장이었다.
이 작품 표면에 보이는 다수의 소성(燒成) 균열(firing cracks)은 대형 도자기 조각 제작의 엄청난 기술적 난제를 보여준다. 이 조각상들은 유약을 덧입혀 다시 한번 소성할 경우 너무 약해져 파손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유화(oil paint)로 채색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색이 지워졌다.
"코미디아 델아르테(Commedia dell'arte) 시리즈" – 이탈리아 가면극 등장인물을 표현한 도자기 조각상


코메디아 델아르테(Commedia dell'arte)의 어릿광대(Harlequins)들은 연극적인 몸짓, 과장된 표정, 기이한 움직임을 통해 요아힘 켄들러(Joachim Kaendler)가 선호했던 역동적인 조각 스타일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작은 조각상으로서의 소장품(Cabinetstücklein als Figürlein)"
켄들러(Kändler)는 자신의 도자기 조각상을 "작은 세계 속의 큰 세계를 묘사하는 작품"이라고 불렀다. 그의 삶과 예술은 새로운 회화적 주제가 등장하던 시대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목가적인 장르, 감성적인 표현, 그리고 거친 풍자의 세계가 화폭을 채우기 시작했다.
앙투안 바토(Antoine Watteau, 1684-1721), 장 바티스트 파테르(Jean Baqtiste Pater,1695-1736), 니콜라스 랑크레(Nicolas Lancret , 1690-1743) 등의 회화 작품은 원래 왕족과 귀족들만이 감상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그들의 그림이 동판화(copper engravings)로 제작됨으로써 널리 퍼졌으며, 켄들러는 이를 즉시 자신의 창작을 위한 영감의 원천으로 활용했다.
또한, 켄들러는 드레스덴 무대에서 활동한 프랑스와 이탈리아 극단의 공연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이들은 때로는 감성적이고, 때로는 강렬한 유머로 관객을 사로잡았으며, 당시 귀족들이 즐기는 공연(divertissement, 궁정 오락)의 일부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공연은 엄격한 궁정 예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을 제공했으며, 이를 통해 귀족 남녀들은 평소 이성(raison)이 지배하던 일상 속에서 억눌렸던 사랑에 대한 갈망을 잠시나마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영예의 신전(The Great Temple of Honour)
아우구스투스 강왕의 절대적 상징이자 부의 과시는 화려한 도자작품으로 구현되었다.
영예의 신전(The Great Temple of Honour)은 높이가 11피트 8인치(약 3.56m)에 달하는 거대한 작품으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이 작품은 1748/49년 요한 요아힘 켄들러(Johann Joachim Kaendler)에 의해 모델링되었다. 이 신전은 개선문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총 123개의 개별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1749년 3월 5일, 즉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Frederick Augustus II)의 영명 축일(Name Day:기독교도가 자기 세례명과 같은 성인의 이름이 붙은 축일을 축하하는 날)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켄들러가 제작한 당시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 남아 있는 ‘영예의 신전’은 1933년, 아우구스투스 강왕(Augustus the Strong)의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여 재현된 작품이다.

켄들러의 작품 중 하나인 십자가 처형 조각군(Kreuzigungsgruppe) 은 라우흐함메르 베스트(Lauchhammer-West)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십자가 처형 조각군(Kreuzigungsgruppe)은 총 17개의 개별 조각으로 구성되었으며, 마이센 도자기로 제작된 가장 큰 종교적 조각 군상으로 평가된다.
Tableware
"백조 서비스(Swan Service)" – 독일 바로크 예술의 걸작

요한 프리드리히 에버라인(Johann Friedrich Eberlein, 1695-1749), 요한 요아힘 켄들러(Johann Joachim Kändler, 1706-1775), 바르샤바 국립박물관(Muzeum Narodowe w Warszawie)
요한 요아힘 켄들러(Johann Joachim Kaendler)가 제작한 "백조 서비스(Swan Service)"는 화려한 과거 시대를 증언하는 가장 인상적인 걸작이며, 독일 바로크 예술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다.
1737년, 작센 왕 아우구스투스 3세(King Augustus III) 아래에서 수상(首相)이자 후에 왕립 도자기 제조소(Royal Porcelain Manufactory)의 총감독이 된 브륄 백작(Count Heinrich von Brühl)이 이 작품을 주문하였다. 이 세기의 도자기 서비스는 완성되기까지 5년이 걸렸다. 그 이전에는 이처럼 거대한 규모와 조각적인 디테일이 풍부한 도자기 세트가 제작된 적이 없었다.
"백조 서비스"의 규모와 디자인
- 총 100명을 위한 서비스 세트
- 2,200개 이상의 개별 도자기 작품으로 구성
- 이름을 상징하는 백조 한 쌍이 갈대 사이를 헤엄치는 모습이 도자기 부조(relief)로 표현됨
- 켄들러는 이 디자인을 위해, 드레스덴(Dresden)의 왕실 및 수도에 보관된 다양한 드로잉과 판화에서 영감을 받음
오늘날에도 마이센(Meissen) 도자기 공장에서 여전히 수작업으로 성형 및 채색되며, 바로크 시대 왕실 연회의 문화를 현대에도 재현하는 독창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은 마이센의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유일무이한 왕실 도자기 세트이다.

뉴 컷아웃(New Cutout)" 패턴

1745년 "뉴 컷아웃(New Cutout)" 패턴을 제작하였으며, 이 패턴은 물결 모양의 컷팅된 가장자리가 특징이다.
꽃잎을 연상시키는 우아한 형태와 물결 모양의 뾰족한 가장자리, 그리고 이중 분할된 아칸서스(Acanthus) 잎 모양의 손잡이로 이루어져 있다. 이 디자인은 켄들러의 대표적인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또한, '마이센 로즈(MEISSEN Rose)’, ‘어니언 패턴(Onion Pattern)’, ‘그린 바인 리프 가랜드(Green Vine Leaf Garland)’와 같은 유명한 장식 스타일도 이러한 디자인을 기반으로 하여 제작되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비교적 절제된 디자인이었으나, 동시에 자연스럽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았다.
자료, 사진출처
https://www.bayerisches-nationalmuseum.de/sammlung/00136783
https://www.porzellan-museum.com/en/museum/museum-knockou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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